
그녀가 물었다.
“왜 내가 좋아?”
왜 나는 그녀가 좋을까. 참 답하기 애매한 질문이다.
다분히 감성적인 대상에 논리적인 연결고리를 찾기란 힘들어 보여서 이내 대답한다.
“잘 모르겠어. 그냥 네가 좋아”
사실 그렇게 대답하고도 얼마나 이런 대답이 진부한 것인지, 부끄럽고 머쓱하다.
이내 마음속으로 정리해서 다시 이야기 한다.
“예쁘고. 착하고. 너랑 있으면 내가 즐거워.”
그렇게 말을 했지만 이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말은 너무나도 불완전하다.
대뜸 그녀가 말한다.
“넌 날 아직 잘 몰라”
곰곰히 생각한다. 그녀를 알았던 지난 시간. 솔직히 아는 것이 별로 없을지 모른다.
나의 추리와 공상속에 있는 그녀를 그녀라고 생각해왔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그녀의 사진을 본다. 그녀가 지나온 삶이 거기에 있다.
나는 그녀의 사진을 통해, 그녀의 과거와 현재가 나와 숨쉬고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날 때면 많거나 적게 그들의 흔적은 고스란히 우리들 자신에 간직된다.
아무리 사소한 만남이라 하더라도 그 누군가의 흔적은 나에게 뭍어나고,
‘나’는 끊임없이 재정의된다. ‘나’는 현재를 살지만 사실은 과거와 함께 호흡하는 것이리라.
나와 그녀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뭍어 있던 수많은 흔적들이 고스란히 뒤섞인다.
곧이어 나는 이러한 삶이 뒤섞이는 과정이 참 재미있다고 느낀다.
따라서 나는 내가 겪는 그녀를 만나고 싶다.
이미 정의내려진 그녀를 ‘잘’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녀를 만나면서 겪는 그녀가 나의 그녀가 될 것이다. 나의 그녀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그녀학 박사학위’를 받기로 결심한다.
모름지기 연구라는 것은 비록 기존에 있었던 논증을 프레임으로 삼더라도, 그 모티브는 오리지널 한 것이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오리지널한 결과가 도출된다. 나의 모티브는 아주 오리지널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는 아주 오리지널한 그녀를 발견할 것이란 확신에 찬다. 물론, 언어는 너무도 불완전 하기 때문에 그 결과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아주 의미있는 논문이 될 것이다.
머뭇거리다 나의 결론을 이야기한다.
“괜찮아. 나는 너를 겪을거야”
역시나 이번에도 말의 한계를 절감한다. 참 역설적인 상황이다.
언어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말의 한계가 절실히 느껴질 줄이야!
하지만 “나도 네가 좋아. 예전부터 좋아했던 것 같아” 라는 그녀의 말이 돌아온다.
그 순간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던 언어학도의 답답한 가슴에는 ‘말 없는’ 행복이 베어났다.


